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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우산 아래의 속도

by napigonae 2025. 12. 23.

 

 

 

■ 우산 아래의 속도

 

비가 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우산이다.
우산은 특별한 물건이 아니지만, 비가 내리는 순간부터 하루의 태도를 바꿔 놓는다. 평소보다 걸음은 느려지고, 고개는 조금 숙여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발밑으로 내려오고, 그제야 길 위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와 빗방울이 만드는 작은 파문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산 아래에서는 말수가 줄어든다.
빗소리가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비닐우산 너머로 흐릿해진 세상은 마치 잠시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 덜 서두르고,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우산 하나가 만들어 주는 이 느린 속도가 의외로 마음에 든다.

우산은 비를 완전히 막아 주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옷자락은 젖고, 신발 끝은 어느새 물을 머금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완전함이 우산을 더 인간적인 물건으로 만든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보호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비를 맞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 삶에서도 우리는 늘 이런 선택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의 거리에는 각자의 우산이 있다.
색도 모양도 제각각이지만, 모두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서로를 피하려다 잠시 부딪히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과 우산을 나누는 짧은 순간이 생기기도 한다. 그 짧은 접점들 속에서 도시는 잠시 덜 낯설어진다.

나는 우산을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다.
카페 한쪽에 두고 나오거나, 지하철 출구 앞에 세워 둔 채로 잊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아쉬움이 남지만, 돌아보면 그 우산들은 늘 비가 그친 뒤에 사라졌다. 어쩌면 우산은 필요할 때만 곁에 있다가, 제 역할을 다하면 조용히 떠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으로 우산을 찍을 때면, 빗방울보다 그 아래의 풍경을 담고 싶어진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 젖은 보도블록, 반사된 불빛. 비 때문에 흐려진 장면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우산은 사진 속에서 주인공이기보다는, 장면을 완성하는 배경에 가깝다.

비가 그치면 우산은 다시 접힌다.
젖은 채로 현관 한쪽에 세워 두고, 일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어진다. 하지만 우산 아래에서 보냈던 시간은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조금 느리게 걸었던 발걸음, 괜히 깊어졌던 생각들, 그리고 빗소리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순간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을 완전히 싫어하지 않는다.
우산 덕분에 하루의 속도가 달라지고, 평소에는 지나쳤을 풍경들을 다시 보게 되니까. 우산은 비를 막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나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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