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을 읽는 시간, 나는 잠시 다른 사람이 된다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지금의 나에서 잠시 벗어난다. 같은 의자에 앉아 있고, 같은 방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책은 그렇게 조용히 사람을 데려간다. 소리도 없이, 약속도 없이. 다만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미 반쯤은 그 세계에 들어와 있다.
어릴 적 책은 모험이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 만나게 해주었다. 책 속의 인물들은 나보다 먼저 울고, 먼저 실패하고, 먼저 용기를 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조금씩 삶의 예행연습을 했다. 현실에서는 아직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책 속에서는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지금, 책의 역할은 조금 달라졌다.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남긴다.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왜 이 문장에서 오래 머물게 되는지. 책은 설명하지 않고,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에 나는 나만의 경험과 감정을 끼워 넣는다. 그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는 속도도 변했다. 예전에는 빨리 끝내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멈춰 서는 문장이 더 소중하다.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접고, 한 문장을 여러 번 되읽는다. 그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누군가 나를 정확히 보고 써준 문장 같아서, 괜히 페이지를 덮지 못하고 한참을 붙잡게 된다.
책은 늘 곁에 있지만,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읽지 않는 날이 길어져도 묵묵히 기다린다. 다시 손을 내밀면 언제든 같은 자리에 있다. 그 점이 책을 믿게 만드는 이유다. 변하지 않는 물성이 주는 안정감,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는 문장들. 책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드물게 느리다.
혼자 읽는 책도 좋지만, 책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는 순간은 더욱 특별하다. 같은 문장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일, 서로 다른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게 되는 시간. 책은 대화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조용한 매개체다.
오늘도 나는 책 한 권을 펼친다. 당장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분명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렇게 아주 천천히 변해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언제나, 생각보다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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