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기_하루를 다시 불러오는 일
일기는 하루가 끝나갈 즈음, 조용히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날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날에 더 필요해지는 기록. 일기를 쓴다는 것은 하루를 평가하기보다, 하루를 다시 한 번 살아보는 일에 가깝다.
일기장은 늘 솔직함을 요구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장이 아니기에, 꾸밀 필요도 설명할 필요도 없다. 오늘 기분이 어땠는지, 무엇이 마음에 걸렸는지, 왜 괜히 피곤했는지. 일기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면서도, 가장 정직한 기록이 된다.
어떤 날의 일기는 길고, 어떤 날의 일기는 한 문장으로 끝난다. “오늘은 그냥 그랬다.”라는 문장 하나만 적혀 있어도 충분하다. 그 문장 속에는 말로 다 풀어내지 못한 감정과 공기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기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게 쓸수록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일기를 쓰다 보면, 감정이 글자에 붙잡히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속에서 맴돌던 생각들이 문장으로 옮겨지면서 조금씩 정리된다. 불안은 이유를 찾고, 기쁨은 형태를 갖는다. 일기는 감정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힘든 날일수록 펜을 잡게 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는 일기는 낯설다. 분명 내가 쓴 글인데,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변해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동시에,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일기는 변화와 지속을 동시에 보여주는 기록이다.
어릴 적 쓴 일기에는 사소한 일들이 가득하다. 날씨, 급식 메뉴, 친구와의 대화. 당시에는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진다. 일기는 미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읽히기 위해 쓰인다는 말이 어쩐지 맞는 것 같다.
매일 쓰지 않아도 괜찮다. 며칠을 건너뛰고 다시 돌아와도, 일기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준다. 그 느슨함 덕분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이어갈 수 있는 기록, 그것이 일기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일기는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특별하지 않았던 하루를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순간을 흘려보내지만, 그중 몇 줄만이라도 붙잡아 두는 일. 그 작은 기록들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의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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