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라는 종이 위의 시간

■ 달력이라는 종이 위의 시간 _ 하루하루를 넘기며 살아간다는 것
달력은 늘 벽에 걸려 있거나 책상 한쪽에 놓여 있다.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것을 오래 바라보지 않는다. 날짜를 확인할 때 잠깐, 중요한 날에 동그라미를 칠 때 잠시 손이 갈 뿐이다. 그러나 달력은 매일 같은 자리에 서서 우리가 지나가는 시간을 묵묵히 받아 적는다. 말이 없고, 표정도 없지만, 가장 정확하게 우리의 삶을 기록하는 물건이다.
새해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달력을 바꾼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달력은 유난히 깨끗하다. 하얀 칸들이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있는 모습은 가능성처럼 느껴진다. 이 칸들 안에 무엇이 채워질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기쁜 날도, 힘든 날도, 아무 일 없던 날도 모두 같은 크기의 사각형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달력은 시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달력의 날짜는 모두 공평해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대하는 하루는 다르다. 어떤 날은 유난히 길고,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그러나 달력 위에서는 모든 하루가 같은 넓이를 가진다. 그 사실이 가끔 위로가 된다. 아무리 힘들었던 날도, 달력 속에서는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게 하나의 칸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날은 더 이상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어릴 적 달력은 기다림의 도구였다. 소풍 날짜, 생일, 방학 시작일에 동그라미를 치며 하루하루를 세었다. 잠들기 전에는 달력을 보며 “이제 며칠 남았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달력은 미래를 앞당겨 주는 마법 같은 물건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날이 달력 위에서는 이미 눈앞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른이 된 후의 달력은 조금 다르다. 기다리는 날보다 버텨야 할 날이 더 많아진다. 마감일, 약속, 기한, 일정들이 빽빽하게 적힌 달력은 숨이 막히기도 한다. 빈 칸이 많았던 달력보다, 메모로 가득 찬 달력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달력은 더 이상 꿈을 세는 도구가 아니라, 책임을 확인하는 표가 된다.
달력에 적힌 글씨는 그 사람의 삶을 닮아 있다. 꼼꼼하게 적힌 일정, 연필로 살짝 써놓은 메모, 지워진 흔적, 급하게 갈겨 쓴 글씨. 같은 달력이어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그래서 남의 달력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사람의 하루를 엿보는 것과 비슷하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반복하며 사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춘다. 한 장이 넘어간다는 것은 한 달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잘 기억나지 않는 날도 있고,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 날도 있다. 달력은 그 모든 날을 동일하게 접어 버린다. 그 냉정함이 오히려 공평하게 느껴진다. 잘한 날만 남기지 않고, 실수한 날도 함께 보내준다.
가끔은 달력에 아무것도 적지 않은 날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약속도 없고, 일정도 없는 하루. 달력 속에서는 비어 있지만, 실제로는 숨을 고르고 자신을 돌볼 수 있었던 날. 그런 날들은 달력에 표시되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달력은 기록하지 않지만, 삶은 기억한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달력은 얇아진다. 넘길 장수가 줄어들수록 마음은 복잡해진다. “벌써 이만큼 왔구나”라는 생각과 “아직 이것밖에 못 했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달력은 늘 객관적인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감정적이다. 같은 달력을 보며 누군가는 성취를 느끼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느낀다.
나는 해가 바뀌면 지난 달력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 해를 살았다는 증거 같아서다. 적힌 글씨 하나하나가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끝난 일정인데도, 그 옆에 남은 메모를 보면 그날의 공기와 기분이 되살아난다. 달력은 지나간 시간을 보관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달력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지금은 언제인가?” 그리고 동시에 말한다. “이 시간도 곧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달력은 조급함을 주기도 하고, 안심을 주기도 한다. 힘든 날 달력을 보면 언젠가는 이 페이지도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달력은 늘 앞으로만 가지만, 그 안에는 이미 수많은 끝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달력을 보며 계획을 세우지만, 계획대로 흘러가는 날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달력에 무언가를 적는다. 그것은 시간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는 표시일지도 모른다. 달력에 흔적을 남기는 일은, 오늘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다.
오늘도 달력의 한 칸이 지나간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였을지라도, 그 하루는 분명히 존재했고, 지나갔다. 달력은 그 사실을 조용히 알려준다. 그리고 내일을 위한 빈 칸을 하나 남겨 둔다. 달력은 늘 이렇게 말없이 우리를 다음 날로 데려간다.
